현대 도시의 감성을 가장 잘 담아낸 서체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Gotham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서체는 2008년 오바마 대선 캠페인에서 크게 주목받았고, 이후 포스터, 광고, 브랜드 아이덴티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산세리프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Gotham의 시작은 컴퓨터 화면이 아니었습니다. 그 뿌리는 오래전부터 뉴욕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이름조차 붙지 않은 평범한 글자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흔해 보이는 글자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시각 언어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은 Hoefler&Co.의 창립자이자 Gotham의 디자이너인 Jonathan Hoefler(조너선 후플러)의 자전적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으며, Gotham이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원문: 《The History of the Gotham Typeface》, Jonathan Hoefler 개인 웹사이트)
거리에서 시작된 글자의 영감

이 글자들은 특별한 이름도 없었지만 늘 주변에 존재했습니다. 유리에 그려지고, 금속에 찍히고, 돌에 새겨졌습니다. 전시 포스터나 향수병, 산업용 로고에도 쓰였지만, 더 자주 술집·이발소·꽃집 간판이나 엘리베이터 내부, 상점 진열창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F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흔히 쓰였던 글자들이 디자인 서적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유행이 바뀌어도 이런 기본적인 글자들은 늘 단정하고 현대적으로 보였으며, 결코 낡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들도 서체 공부를 이런 길로 시작했습니다. 이미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서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매킨토시 컴퓨터에 있던 100여 종의 서체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Jonathan Hoefler(조너선 후플러)가 PushPin Group의 작은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훨씬 더 방대한 서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PushPin의 서고에는 수많은 활자 견본집이 있었고, 이는 사라진 납활자와 사진식자 시대의 글자들을 마치 화석 기록처럼 보여주었습니다. Hoefler는 밤마다 이 책들을 뒤적이며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산세리프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찾던 해답은 오래된 전통 서체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그려진 글자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서체와 글자 그리기

서체(Type)는 미리 만들어져 여러 번 조합할 수 있는 글자 시스템입니다. 반대로 글자 그리기(Lettering)는 특정 상황에 맞춰 한 번만 쓰이는 글자를 직접 디자인하는 방식입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책 본문은 활자 조판으로 인쇄했지만, 표지나 삽화, 책등의 글자는 대부분 손글씨였습니다.
이렇게 서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손글씨는 매체와 제작자에 따라 고유한 전통과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석판화 포스터, 지폐 위의 조각된 글자, 금박으로 장식된 상점 유리문 간판, 묘비에 새겨진 글자처럼 모두가 활자가 아닌 맞춤형 손글씨였던 것입니다.
물론 서체와 손글씨는 늘 영향을 주고받아 왔습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도 손글씨를 모델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후플러가F 매혹된 이 손으로 그린 산세리프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서체화하려는 시도는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도전이 그를 서체 디자이너로 이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안에서 탐험할 기회, 그리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백을 보았습니다.
미완의 시도에서 디자인의 전범으로: Gotham의 탄생 과정
뉴딜의 독수리, Eagle Bold의 등장

산세리프체에는 크게 두 가지 계열이 있습니다. Grotesque(괴상체)는 타원형을, Geometric(기하체)는 원형을 기반으로 합니다. Hoefler(후플러)가 매료된 글자들은 두 계열의 장점을 합치면서도 단점은 피해간 스타일이었습니다. Futura처럼 간결하고 명확하지만 기하체 특유의 딱딱함은 없었고, Akzidenz-Grotesk처럼 무게감과 친근함이 있으면서도 활자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즉흥적으로 보였습니다.
Helvetica 같은 산업적 산물과 달리, 거리의 글자들은 더 현실적이고 믿음을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죠.

왼쪽: 국가회복관리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의 파란 독수리 엠블럼에는 손으로 그린 레터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1933년 American Type Founders Company를 위해 Morris Fuller Benton이 디자인한 Eagle Bold.
이런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때였습니다. 대공황 극복을 위해 설립된 국가재건청(NRA)은 통일된 시각 체계를 도입했습니다. 파란색 독수리 로고, 빨강·하양·파랑·검정의 강렬한 색 조합, 그리고 직설적이고 현대적인 산세리프 글자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상점 유리창, 상품 라벨, 배지에 쓰이며 뚜렷한 시각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1933년, American Type Founders의 디자인 디렉터 Morris Fuller Benton(모리스 풀러 벤턴)은 이 손글씨 스타일을 기반으로 Eagle Bold라는 활자를 선보였습니다. 그는 NRA 글자의 아르데코적인 성격을 더욱 강화했고, 원래는 둔각이던 M과 W를 날카로운 예각으로 바꿔 글자에 힘을 주었습니다.
Eagle Bold는 흥미로운 모순을 지닌 서체였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기하적이지만, 일부 글자는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후플러는 Eagle Bold 전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벤턴의 시도에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기하체와 괴상체의 경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1992년 여름, 마침내 거리의 무명 글자들에서 영감을 받아 보편적이고 명확하며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산세리프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시도: 더 안정적이고 단호한 Typeface X
1992년, 후플러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손글씨 산세리프 스타일을 바탕으로 대문자 세트를 그려냈습니다. 그는 이 작업에 ‘Typeface X’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벤턴처럼 기하체와 괴상체의 장점을 결합하려 했지만, 화려함보다는 단호하고 명확한 서체를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Eagle Bold가 넓고 좁은 글자 폭의 리듬을 가진 것과 달리, Typeface X는 글자 폭을 일정하게 맞춰 안정감을 주었고, 전체적으로는 산업용 활자에 가까웠습니다. O는 기하체처럼 원형에, S는 괴상체처럼 타원형에 가까웠습니다. 단순해 보였지만 섬세한 조정이 숨어 있어 차가움 대신 따뜻함이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 최종 교정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벤턴의 Eagle Bold는 작은 글자 크기에서 오는 한계를 피하기 위해 아예 18pt 이하에서는 쓰지 않도록 했는데, 후플러는 Typeface X의 굵은 획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상도 프린터로 인쇄해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작은 크기에서는 날카로운 획이 뭉개졌고, M과 N은 외곽이 지나치게 좁아 보였으며, A와 V의 뾰족한 각은 불필요하게 넓은 여백을 만들었습니다. 둔각으로 바꾸면 문제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러면 큰 크기에서의 날카로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Typeface X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후플러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의뢰로 Knockout 패밀리 개발에 집중했고, 1994년 한 해를 그 프로젝트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타임스 빌딩 근처에서 마주친 한 간판이 Typeface X의 운명을 바꾸며, 훗날 Gotham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회의 도래: 새 협업, 새 출발

뉴욕 8번가 625번지에 있는 Port Authority Bus Terminal 외벽의 커다란 간판, "PORT AUTHORITY BUS TERMINAL". 후플러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무명의 서체 스타일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글자는 1950년 건물 원형 때 만들어진 것이었고, 1979년 확장 공사 후에도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949년 공사 현장 표지판이나 1964년 뉴욕 만국박람회 건축물에서도 같은 글자 스타일이 사용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겉보기엔 소박했지만 놀라울 만큼 정교했습니다. 특히 S와 B처럼 복잡한 글자도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후플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얻었습니다. 바로 대문자 A의 꼭대기는 뾰족한 삼각형이 아니라 평평해야 한다는 것. 이 작은 깨달음이 훗날 Gotham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른쪽: 1964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 설치된 포트 오소리티 헬리패드의 공사용 레터링 또한 터미널 명판의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Knockout, Hoefler Titling, Verlag, Mercury 같은 다른 서체 작업에 몰두하면서 Typeface X는 잠시 잊혔지만, 마음속에서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회는 2000년에 찾아왔습니다. Tobias Frere-Jones(토비아스 프레어-존스)와의 협업 덕분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름 없는 산업 글자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Tobias는 도로 표지판 글자를 토대로 Interstate를 디자인했고, 후플러는 Champion Gothic과 Knockout으로 19세기 후반 고딕 활자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첫 공동 작업은 Pentagram의 Michael Bierut(마이클 비에루트)의 요청으로 진행된 Lever House 맞춤 서체 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GQ 매거진이 “현대적이고 간결한” 서체를 원한다는 요청을 하면서, Port Authority 간판은 마침내 Gotham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 Gotham의 첫 구현

2000년 여름, GQ 매거진의 의뢰로 후플러와 토비아스 프레어-존스는 Port Authority 간판을 기반으로 새로운 서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소문자 디자인이었습니다. 거리의 글자들에는 소문자 예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팀은 대문자의 성격을 이어받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소문자를 직접 창조해야 했습니다. 처음 만든 소문자는 크기가 작고 상단부가 길어 다소 복고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크기를 키우고 자간을 조정하며 e, f, g 같은 글자 형태를 손보면서 점차 현대적인 인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드로잉: Tobias Frere-Jones, 주석: Jonathan Hoefler.
이 과정에서 탄생한 Gotham Light는 Bold의 힘과 명확함을 유지하면서도 한층 우아하고 가벼운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처음에는 Light, Bold, 그리고 그 사이 굵기 두 가지로 시작했지만, 곧 Italic과 Condensed 버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Condensed에서 O의 형태를 직선에 가깝게 할지, 타원형으로 할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타원형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DIN 서체와 차별화되면서도 Gotham만의 따뜻한 개성을 더해주었습니다.

2001년에는 디자이너 Jesse Ragan(제시 레이건)이 합류해 더 얇고 더 굵은 굵기를 추가했고, Gotham Condensed는 처음 4종에서 9종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디자인 공간의 확장: Gotham 패밀리 완성
2000년대 초, 잡지와 신문 편집팀은 좁은 칼럼에 적합한 서체를 원했습니다. 이 요구에 맞춰 Gotham은 Narrow와 Extra Narrow 버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05년 디자이너 Sara Soskolne(사라 소스콜네)가 합류하면서 토비아스 프레어-존스와 함께 Narrow와 Extra Narrow를 비롯해 총 66종의 방대한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숫자, 기호뿐 아니라 그리스 문자와 키릴 문자까지 포함되며 글로벌 사용 환경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2년 공개된 Gotham 샘플북은 곧 뉴욕 전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와 예고편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미국영화협회가 영화 예고편 등급 표시의 표준 서체로 Gotham Bold를 공식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04년 7월 4일, 자유의 탑 기초석에 새겨진 Gotham은 9·11 이후 뉴욕의 회복과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서체가 되었습니다. “Gotham은 어제 만들어진 것도, 내일 사라질 것도 아닌 서체”라는 평처럼, Gotham은 이미 시대를 초월한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진 출처: 로이터 (Reuters)
대통령의 서체: Gotham과 정치 언어
2007년, 오바마 상원의원이 대선 캠페인에서 Gotham을 사용하면서 이 서체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디자이너 Scott Thomas(스콧 토머스)와 John Slabyk(존 슬라빅)은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통해 캠페인 메시지에 일관성을 부여했고, Sol Sender(솔 센더)가 만든 로고와 함께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후 Gotham은 백악관의 공식 서체가 되었으며, 2012년 오바마의 재선 캠페인에서도 다시 활용되었습니다. 2014년 설립된 오바마 재단 역시 Gotham을 사용했습니다. 점차 당파를 가리지 않고 정치 캠페인의 표준 서체로 자리 잡았고, 201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50명 가까운 후보가 Gotham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AP 통신은 Gotham을 “10년의 글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진: AP/Paul Sancya.
2011년에는 MoMA가 Gotham을 영구 소장품으로 등록했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초기 매킨토시와 함께 전시되며 “좋은 서체는 MoMA 컬렉션에 들어야 한다”는 큐레이터의 평가를 입증했습니다. 이로써 Gotham은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Gotham은 뉴욕 거리의 이름 없는 글자에서 출발해 결국 백악관과 세계 무대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디자인 전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체는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발견을 거치며 다듬어졌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Gotham은 명확함, 단호함, 그리고 친근함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응답했습니다. 동시에 디자인이 단순히 시각적 장치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